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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  윤기찬



[ 진실이 없을 때, 죄책감은 어디에 닿는가 ]

Delta://Yoon Gi-chan

"The mind is its own place, and in itself can make a heaven of hell, a hell of heaven." - John Milton


입 안에서 마지막 남은 술기운이 신경세포처럼 증발하고 있었다.

럼의 달고 묵직한 향과 알코올의 온도가 사라진 자리에는, 꺼끌꺼끌한 공백만이 남아 혀를 굴리는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는 옥상 난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당신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웃을 때마다 한쪽 뺨에만 선명히 파이는 보조개와, 값비싼 향수 특유의 바닐라와 담뱃잎 향이 도시의 젖은 공기와 뒤섞여 그와 당신 사이의 거리를 멋대로 지웠다.

그의 손에서는 크롬 라이터가 조용한 짐승처럼 춤을 췄다.

딸깍, 딸깍.

불꽃을 피워 올릴 의도 따위는 없는,
오직 그만이 이해하는 리듬에 맞춘 정교한 소음이었다.

그 소리는 당신과 그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정적을 잘게 조각내고 있었다.

“…….”

당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사이,
그가 먼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늘 그런 식이었다. 그는 대화의 주도권을 자신이 갖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종류의 인간이었으니까.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눈은 당신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당신의 어깨 너머, 별 하나 없는 도시의 야경을 향해 있었다.

마치 거대한 전자회로 기판처럼 얽히고설킨 불빛의 강. 그는 그 강 너머 아주 먼 과거의 어느 지점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옛날에, 아주 좆같은 임무가 하나 있었어. 작전명 같은 건 개나 줬지. 늘 그렇듯,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그냥 사진 한 장. 얼굴 반쯤 가려진 새끼였는데, 어느 공장지대에서 찾아내라는 거야. 쉽지. 안 그래?”

그는 당신의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현장에 비슷한 놈이 있었어. 맞나? 씨발, 그걸 어떻게 알아. 어두컴컴한데. 그냥 감이지. 동물적인 감 같은 거.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만, 그때는 그게 전부였거든.”

그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이는지, 마른침을 삼키는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상부에선 딱 3초를 줬어. 확인하고, 아니면 말고. 그게 룰이었거든. 3, 2, 1.”

그는 말을 끊고, 라이터를 쥔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치 카운트다운을 하듯.

“그리고 총성. 간단하지. 소음기 때문에 소리도 거의 안 났어. 그냥… 퍽, 하고. 사람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방금 겪은 일도 아닌,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의 줄거리라도 설명하는 무심한 투였다.

하지만 그가 라이터를 돌리는 속도는 아까보다 미세하게 빨라져 있었다. 그의 불안을 드러내는 유일한 지표였다.

“근데 가방을 열어보니, 씨발. 안에 설비 점검표랑 작업 허가증 같은 게 있더라고. 그냥… 그 시간에 거기서 일하던 평범한 새끼였던 건지.”

입꼬리는 분명히 올라가 있었지만, 웃음의 온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텅 빈 웃음이었다. 
그는 당신을 똑바로 봤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상대의 동공까지 파고드는 것. 그의 오랜 버릇이었다.

“어때, 꽤 잘 만든 블랙코미디지 않아? 작전은 대성공, 나는 칭찬 세례. 아무도 그 새끼 이름 같은 건 안 물어보더라고. 그게 제일 웃긴 포인트야. 아무도 모른다는 거. 그 사람의 가족도, 회사도, 그냥 실종 처리됐을걸. 세상에서 그냥 증발해 버린 거지.”

딸깍. 딸깍. 불은 여전히 켜지지 않았다. 뚜껑을 여닫는 소리가 그의 혼잣말에 추임새처럼 박혔다.

“그때부터 표정 없는 얼굴들이 더 무서워졌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 인간들 있잖아. 속으로는 칼을 가는지, 아니면 그냥 내일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지. 그 평범함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거든. 차라리 악의가 명확한 편이 상대하기 쉬워.”

그는 고개를 젖혔다. 도시의 인공적인 불빛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어지럽게 번졌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너무 많은 단어들을 한꺼번에 삼켜버린 사람처럼, 아주 길고 무거운 침묵을 만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말이 너무 많아서, 서로 뒤엉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검은 침묵이었다.

그 침묵은 당신을 그에게서 가장 먼 곳으로 밀어냈다.
그가 방금 아주 잠깐 열었던 내면의 작은 틈을, 다시 닫아버리는 소리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아, 씨발. 담배 땡기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라이터를 켰다.

치직- 하고 피어오른 작은 불꽃이 그의 얼굴에 짧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후, 연기를 허공에 길게 뱉었다. 방금 전까지 그의 얼굴에 머물던 그늘은 연기와 함께 흩어지는 듯했다.

그는 당신을 보며 다시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내려갈까? 방금 그 얘기, 그냥 지어낸 거야. 알지?”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얼굴 위로, ‘아무것도 믿지 마’라는 투명한 경고문이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List :  윤기찬

© 2025 Void Index. All rights reserved.델타인베스트는 기계님의 허락을 받고 세계관을 참고하여 영감을 받아 제작한 설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