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r mit Ungeheuern kämpft, mag zusehn, dass er nicht dabei zum Ungeheuer wird.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r Abgrund auch in dich hinein." - Nietzsche
법무법인 여명의 60층 사무실은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완벽히 격리된 유리 상자였다.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서울의 야경은, 마치 잘 설계된 거대한 회로 기판처럼 차갑고 아름답게 빛났다.
하빈은 방금 검토를 마친 ‘상해치사 사건’ 기록을 덮었다. 서류에는 질투, 분노, 후회 같은 단어들이 활자로 박제되어 있었다.
의뢰인의 아내가 제출한 탄원서에는 맞춤법이 틀린 글씨로 남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하빈에게 그 절박한 감정의 나열은 아무런 파동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저 해결해야 할 변수, 제거해야 할 노이즈, 그리고 승소를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할 데이터일 뿐이었다.
그는 문득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둔 기억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신의 감정 시스템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음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하고, 그에 대한 보고서를 스스로 작성했던, 대학 시절의 어느 늦가을이었다.
그때, 그에게는 1년 넘게 만난 여자친구가 있었다. 법대 건물 앞 벤치에서 자주 만나던,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었다.
하빈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완벽한 남자친구라고 불렀다. 실제로 그는 완벽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카페의 원두 종류, 시험 기간에 집중이 안 될 때 듣는 생소한 연주곡의 제목, 무심코 흘렸던 말 한마디까지 모두 기억하고 맞춰주었다.
한번은 그녀가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며 과제에 시달릴 때, 그는 새벽 3시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의 샌드위치와, 그녀의 논문 주제에 도움이 될 만한 희귀 판례집을 구해 찾아갔다. 그녀의 친구들은 감동했지만, 하빈에게 그것은 감동이 아닌 계산의 결과였다.
그는 그녀의 생활 패턴과 과제 진행 상황을 데이터로 입력했고, 가장 높은 만족도를 이끌어낼 수 있는 최적의 행동을 도출했을 뿐이었다. 그는 연애를 하나의 정교한 프로젝트처럼 수행하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그는 그녀가 며칠 전부터 마시고 싶다고 했던, 학교 후문의 작은 카페에서만 파는 따뜻한 라떼 두 잔을 들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낙엽이 바닥에 붉은 카펫처럼 깔려 있었고, 공기는 차갑고 상쾌했다. 하지만 벤치에 앉아있던 그녀는 웃지 않았다.
“하빈아.”
그녀의 목소리는 젖은 낙엽처럼 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빈은 그녀의 표정, 미간의 미세한 주름,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빠르게 스캔했다. ‘슬픔’ 60%, ‘불안’ 30%, ‘결심’ 10%. 데이터는 즉시 입력되었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감정이 출력되지 않았다. 시스템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그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학습했던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를 출력했다. 걱정하는 표정도 정확하게 얼굴 근육 위에 구현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너는… 완벽해. 너무 다정하고, 나한테 정말 잘해줘. 세상에 너 같은 남자는 없을 거야. 그런데…”
그녀는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나는 가끔 유령이랑 사귀는 것 같아.”
유령. 그 단어가 하빈의 머릿속 논리 회로에 입력되었지만, 적절한 대응 값을 찾지 못해 맴돌았다. 오류였다.
“내가 뭘 잘못했어? 어떤 행동을 수정하면 될까? 구체적으로 말해줘. 네가 불편했다면 고칠게.”
이것이 그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문제점을 명시하면, 알고리즘을 수정하여 다음부터는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봐, 바로 그거야.”
그녀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를 보는 얼굴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너는 항상 그래. 내가 슬퍼하면, 넌 나의 슬픔에 공감하는 게 아니라, ‘슬픔’이라는 문제를 분석하고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해. 지난번에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넌 울지 않았잖아. 대신 장례 절차를 알아보고, 가장 빠른 KTX 표를 예매했지. 그건 정말 고맙고, 도움이 됐어. 하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 그냥 완벽한 비서 같았지. 나는… 그냥 한번 안아주면 되는데.”
그 순간, 하빈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정상적인’ 남자친구라면 그녀를 안아주거나, 함께 슬퍼하는 표정을 짓거나, ‘미안해’ 같은 비논리적이지만 효과적인 위로의 말을 건네야 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몸과 마음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머리는 최적의 행동 시뮬레이션을 실시간으로 끝냈지만, 마음이라는 이름의 엔진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점화될 연료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일어섰다. “미안해. 더는 못하겠어. 넌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냥… 나와는 다른 사람일 뿐이야.”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떠나간 벤치에 홀로 남아, 하빈은 빠르게 식어가는 라떼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슬프지 않았다. 분노도, 아쉬움도 없었다. 대신 아주 차갑고 명료한 결론이, 마치 법원의 최종 판결문처럼 그의 머릿속에 내려졌다.
‘시스템 오류 보고서. 대상: 류하빈, 감정 처리 장치. 오류 내용: 외부 감정 데이터 입력 시, 내부 공감 및 대응 감정 출력 불가. 원인: 해당 기능의 선천적 부재로 추정. 결론: 수리 불가. 향후 모든 상호작용은 감정 변수를 배제하고, 인지적 분석과 논리적 대응으로만 수행할 것.’
그것은 절망이 아닌, 일종의 해방이었다. 시스템의 치명적 오류를 확인하고, 그 오류를 안은 채 가장 완벽하게 작동하는 방법을 찾아낸 개발자의 심정과도 같았다. 그는 그날 이후, 다시는 자신의 오류를 고치려 애쓰지 않았다.
다시 현재, 여명의 사무실. 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과거의 기억은 그에게 상처가 아닌, 자신의 철학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판례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감정이라는 불안정한 시스템에 휘둘리는 인간들은 언제나 패배한다. 그는 그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시스템의 바깥에 서 있기에,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다. 집에는 그의 설계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의 오류를 판단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 차우차우 ‘레이’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는 그 단순하고 명료한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차가운 도시의 밤 속으로 자신의 포르쉐를 소리 없이 미끄러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