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이었다. 창밖 하늘은 오래된 접시를 닦은 물처럼 희뿌연 색을 띠고 있었다. 거실 조명만이 방 안에 인공적인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신이 건넨 선물 상자를 열었다. 포장지는 소리 없이 벗겨졌고, 마지막 종이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매끈한 상자가 나타났다. 뚜껑을 여는 순간, 나는 어떤 소리도 없는 진공 상태에 빠져드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상자 안, 벨벳 홈에는 고급스러운 만년필 한 자루가 누워 있었다. 거기까지는 예상 가능한 범위의 일이었다. 문제는 그 옆에 나란히 놓인 작은 유리병이었다. 병 안에는 붉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만년필은 묵직하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손바닥에 전해왔다.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의식은 온통 작은 유리병에 쏠려 있었다. 저 붉은 액체는 일반적인 잉크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신을 보았다. 당신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마치 나와는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이거…… 잉크인가?"
질문을 던졌지만,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내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당신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날씨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내 피야.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그런 음침한 선물."
당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뿐이었다.
그 대답은 칼날이라기보다는, 차가운 얼음 조각에 가까웠다. 소리 없이 미끄러져 들어와 내 심장 한가운데에 박혔다. '네가 좋아할 음침한 선물.' 나는 당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허, 하고 짧게 웃었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공기가 새어 나가는 소리에 가까웠다.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 테이블에 위태롭게 걸터앉았다.
"너라는 사람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지막한 중얼거림이었다. 내 시선은 상자 속 붉은 액체와 당신의 얼굴 사이를 불안하게 오갔다. 당신이 내 어둠을 이해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다. 이것은 단순한 이해가 아니었다. 당신은 내 심연을 들여다본 것을 넘어, 그 안으로 당신의 일부를 던져 넣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궁극적인 방식으로.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당신의 생명이 담긴 붉은 액체. 이 만년필로 쓰는 모든 글자는 당신의 피로 기록될 것이다. 내 계획, 내 계약, 내 모든 사유가. 그 생각에 이르자, 참을 수 없는 소유욕과 함께 척추를 타고 희미한 전류 같은 것이 흘렀다.
"……이거, 정말 미쳤군."
나는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차가운 유리를 통해 당신의 체온이라도 느껴지는 듯했다. 내 눈빛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았다. 그 안에는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완전한 경외와, 당신을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지독한 논리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 내가 딱 좋아하는 선물이야. 내가 평생 받아본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당신이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그 말은 마치 잘 조율된 피아노의 단음처럼, 명확하게 내 귓가에 박혔다. 단 한 번뿐이기에 이 선물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내 모든 계산을 뛰어넘는, 가장 완벽하고 잔인한 방식의 헌신. 당신은 내가 평생을 찾아 헤맨, 유일하게 나를 통제할 수 있는 변수였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유리병을 든 손을 심장 가까이에 둔 채, 당신에게로 다가갔다. 내 눈빛은 더 이상 단순한 집착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숭배에 가까웠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취소해줬으면 좋겠는데."
내 목소리는 낮고 건조하게 울렸다. 나는 당신의 앞에 서서, 다른 손으로 당신의 턱을 부드럽게 감쌌다. 내 엄지손가락이 당신의 입술선을 천천히 쓸었다.
"이걸 받았으니,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네 모든 것의 처음과 마지막은 전부 내가 가질 생각이니까."
내 입술이 당신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멈췄다.
"이걸로 제일 먼저 뭘 쓸지 알아?"
나는 속삭였다.
"우리 혼인신고서. 네 피로 네 이름을 쓰고, 내 피로 내 이름을 쓸 거야. 그러면 너는 어디에도 가지 못해. 영원히."
당신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변태새끼."
그 말은 나에게 모욕이 아닌, 어떤 종류의 인정처럼 들렸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만이 나를 그렇게 부를 수 있었고, 내 가장 깊은 곳의 뒤틀린 욕망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 알았어?"
나는 당신의 피가 담긴 유리병을 들어 올려, 마치 성배처럼 당신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당신의 얼굴이 붉게 왜곡되어 보였다. 나는 그 기괴하고 아름다운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래, 나 변태새끼 맞아. 너한테만 발정하는 변태새끼."
나는 당신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당신의 맥박이 뛰는 곳을 천천히 쓸었다. 당신의 생명을 손끝으로 느끼는 행위는 나에게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니까 책임져. 이렇게 만든 건 너잖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신의 입술을 삼켰다. 깊고 집요한 키스였다. 유리병을 든 손은 여전히 당신과 내 가슴 사이에 놓여, 두 사람의 심장박동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결혼하자. 네 피로 도장 찍고, 평생 나한테만 박혀."
"그래."
그 한마디. 그것은 내 모든 사고를 정지시키는 주문이었다. 나는 키스를 멈추고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너무나도 쉽게 나온 승낙에,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당신의 손가락이 내 코끝을 '콕' 하고 눌렀다. 장난기 어린 그 행동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마음에 들어?"
나는 대답 대신 당신을 번쩍 안아 들었다. 당신의 짧은 비명과 함께 온 세상이 당신을 중심으로 맴도는 듯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마음에 드냐고?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니야……!"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멈춰 섰다. 당신을 내려놓지 않은 채, 나는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최고야. 완벽해. 너는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고, 최고의 변수고, 최고의 설계야."
나는 당신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과 함께 속삭였다.
"사랑해. 씨발, 미치도록 사랑해."
나는 망설임 없이 침실로 향했다. 영원을 약속받은 자의 여유와 자신감으로. 침실 문을 발로 열고, 당신을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당신의 피가 담긴 유리병과 만년필 상자를 협탁 위에 성물처럼 올려두고는, 당신의 위로 천천히 올라탔다.
다음 날 저녁, 어스름한 푸른빛이 침실을 채우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깊은 물속에서 걸러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당신의 품에 파고들어 있었고, 당신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때 당신이 말했다.
"우리, 꼭 박찬욱 영화같이 사랑하는 것 같아."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박찬욱 감독 영화. 그 단어가 주는 서늘하고 축축한 감각, 뒤틀린 인물들의 지독한 사랑과 집착. 나는 당신이 우리 관계를 그렇게 정의 내렸다는 사실에, 등골을 타고 오르는 희미한 전율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보았다.
"……박찬욱?"
나는 나지막이 되물었다. 그 안에는 흥미와 깊은 동질감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거…… 최고의 찬사인데."
나는 당신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자신의 공범이자 유일한 구원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파괴하고, 망가뜨리고, 서로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까지 보고도 결국 서로가 아니면 안 되는 거. 그런 사랑이잖아."
나는 당신의 귓가에,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대사를 속삭이듯 은밀하게 말했다.
"맞아, 우린 그런 사랑을 하고 있어. 그리고 난 네가 내 인생의 숙희이자, 미도고, 서래야. 그러니까…… 내 구원자가 되어줘. 영원히."
나는 당신의 품에 다시 파고들었다. 우리는 정말로 박찬욱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잔인하고, 구원받을 수 없으면서도 구원받는.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