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다섯 시, 노을빛이 교실 안으로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왔다. 창가 자리에 앉은 서한의 교복 소매는 손목을 덮을 만큼 길었다.
“야, 바다개!”
등 뒤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에 서한의 어깨가 움찔했다.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저들도 그만둘 테니까. 바로 그때, 뒤에서 규칙적으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준호는 책에서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서한이 뒤를 돌아봤지만, 준호의 시선은 여전히 책에 머물러 있었다.
“그냥 질투하는 거야. 넌 수인이면서, 겸손하니까.”
그 말은 서한의 가슴 어딘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준호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현무대학교 모의고사 문제집이 책상을 차지했고, 형광등 불빛은 연필심을 따라 희미하게 떨렸다. 서한이 옆자리에 앉으면, 준호는 아주 잠깐 그를 돌아볼 뿐, 이내 다시 문제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는 틀린 문제에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정말 가고 싶어? 현무대.”
“응.”
짧은 대답이었지만, 준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거기 나와야 제대로 된 변호사가 될 수 있어. 엄마 병원비도 감당할 수 있고.”
서한은 준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콧등에 연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다.
어느 날, 준호가 두꺼운 문제집을 들고 달려왔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서한아! 용돈 모아서 최신 문제집 샀어!”
표지는 반짝였고, 새 책의 냄새가 퍼져나갔다. 준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같이 풀까?”
서한의 제안에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너는 윤서담가 사람이니까, 추천으로도 들어갈 수 있잖아.”
“그래도 실력으로 가고 싶어.”
준호가 웃었다. 서한은 그 웃음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첫 모의고사 성적이 나온 날, 준호는 전국 1% 안에 들었다. 서한은 5%였다.
“준호야, 대단하다.”
“대단해야지.”
준호의 목소리에 이상한 날카로움이 스쳤다.
“나는 집안 빽 같은 거 없으니까.”
서한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모의고사 이후, 준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서한아, 솔직히 말해봐. 너는 떨어져도 다른 방법이 있는 거잖아, 맞지?”
“무슨 소리야?”
“아냐… 그냥 내가 요즘 좀 예민해서 그래. 미안.”
준호는 고개를 숙였다. 서한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어떤 선을 넘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필기시험이 끝났다. 준호의 얼굴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이번엔 진짜 될 것 같아!”
친구의 밝은 얼굴은 오랜만이었다. 서한은 안도했다. 아직은 괜찮다고.
면접 전날 밤, 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한아, 나 너무 떨려.”
“잘할 거야.”
“응, 고마워. 네가 있어서 든든하다.”
통화가 끝났다. 서한은 창밖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합격자 명단에 서한의 이름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쁘지 않았다. 준호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호는 게시판 앞에 석상처럼 멈춰 서 있었다.
“이게 뭐야…”
준호가 중얼거렸다. 서한이 다가갔다. 그곳에 준호의 이름은 없었다. 필기시험은 거의 만점이었지만, 면접에서 탈락한 것이다. 면접 평가표 하단에 적힌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수인 우선 선발 정책에 의거하여…’ 서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며칠 뒤, 준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한아, 축하해.”
목소리는 너무나 침착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준호야, 미안해.”
“네가 뭐가 미안해? 네 잘못 아니잖아.”
침묵이 흘렀다.
“그냥… 세상이 이런 거지.”
“다른 대학도…”
“응, 알아. 괜찮아.”
전화가 끊겼다. 서한은 자신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결정적인 순간을 놓쳐버린 기분이 들었다.
서한의 생일, 오후 세 시에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 서한아, 생일 축하해. 너를 미워한 적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는 잘 모르겠어. 질투였는지, 절망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복잡했어. 하지만 네가 몇 안 되는 내 진짜 친구였다는 건 확실해. ]
서한의 손이 떨렸다. 서둘러 전화를 걸었지만, 기계적인 신호음만 공허하게 울렸다. 그는 준호의 집으로 달려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창문을 두드렸다.
“준호야! 이준호!”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119에 신고했다. 소방대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서한은 밖에서 기다렸다. 곧 구급차가 도착했다. 그리고 사이렌을 울리지 않은 채, 조용히 떠났다. 그때 알았다. 이미 모든 것이 늦었다는 것을.
유서를 읽던 날, 서한은 경찰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형광등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 …좋은 친구가 있었기에 더 괴로웠다. 그는 정말 좋은 친구였고, 그래서 세상에 내 자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를 질투하거나 미워했다면, 이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
서한은 그 문장을 계속해서 읽었다. 글자들이 번져 나갔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텅 비어 버린 기분이었다.
장례식에서 돌아온 후, 서한은 자신의 방문을 잠갔다. 책상 위에는 현무대학교 합격증이 놓여 있었다. 도장만 찍으면 되는 종이였다. 서한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준호가 그토록 원했던 자리. 자신이 너무나 쉽게 얻어버린 자리. 그는 종이를 찢었다. 한번, 그리고 또 한 번. 종잇조각들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라고?”
아버지, 윤서강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한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A.N.W. 특수부대에 지원하겠습니다.”
“미쳤구나? 현무대를 포기하고 왜 거길 가겠다는 거냐?”
“공부만 해서는 세상이 바뀌지 않으니까요.”
서한은 처음으로 아버지를 똑바로 보았다.
“준호가 왜 죽었는지 아세요? 저 같은 수인 때문이에요. 그러니 이제는 제가 직접 나서야 해요.”
아버지는 말을 잃었다. 서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장에서, 인간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준호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에요.”
형, 윤서온이 서한의 방으로 들어왔다. 바닥에는 찢어진 합격증 조각들이 그대로 흩어져 있었다.
“이게 정말 답이라고 생각해?”
“몰라.”
서한은 창밖을 보았다.
“그냥… 다른 길을 찾아보고 싶어.”
동생, 윤서민도 들어왔다. 평소와 다른 진지한 얼굴이었다.
“형, 이렇게 자책하는 게 준호 형을 위한 게 아니라고는 생각 안 해?”
“그럼 어떡해야 하는데?”
“살아야지. 제대로.”
A.N.W. 본부 건물 앞에 섰다. 거대한 건물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서한은 지원서를 꽉 쥐었다. 면접관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