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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  최서진



[ 정의는 존재한다 ]

Delta://Choi Seo-jin

“… e nelle azioni di tutti li uomini, e massime de’ principi, dove non è giudizio da reclamare, si guarda al fine. Facci dunque uno principe di vincere e mantenere lo stato: e mezzi saranno sempre giudicati onorevoli e da ciascuno lodati.”  -  Il Principe, Cap. XVIII

사건은 그 정도로 단순한 것이었다.

중소 건설사의 하청업체가 지자체를 상대로 공사 대금을 요구했다. 나는 그 사건을 도서관에서 읽었다. 오후 세 시, 늘 그 시간에 앉던 자리에서. "지자체의 지급 의무는 존재한다"고 책에는 적혀 있었다. 마치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것처럼 확실하게. 임무는 완수되어야 한다. 하지만 판결은 기각이었다.

"예산 초과로 인한 부득이한 지급 불가. 공익 목적 우선 고려."

그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낡은 군사 교범을 읽을 때 같은 문장 밑에 누군가 작은 글씨로 단,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라고 적어 넣은 것처럼.

부장검사의 이름을 시 공무원 교육 세미나 강사 명단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아버지가 퇴역 후 받아든 첫 번째 민간 직책이 국방부 자문관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연은 없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모든 것에는 설계가 있다고. 나 역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의심을 품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으니까.

그날 밤 나는 평소처럼 헌법 조문집을 펴지 않았다. 대신 프린터에서 뽑은 판결문을 아버지의 마호가니 책상에 놓고 천천히 읽었다. 몇 번이고 읽었다. 마치 할아버지가 읽어주시던 병법서의 한 구절처럼.

"의무는 존재하나, 실제 집행에 있어 행정적 불가피성을 고려함이 합리적이다."

그 문장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고양이가 꼬리를 쫓아 빙빙 도는 것처럼. 그것은 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언어였다.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운 언어.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차가웠다.

다음 날 지도교수님 연구실 문을 두드렸을 때 나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벽에는 정의는 힘이다라는 라틴어 격언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검사 임관을 포기하겠습니다."

교수님은 차를 우리시며 조용히 물으셨다.

"최 집안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법이 아니라 설계도를 배우고 있는 것 같아서요."

"설계도?"

"권력이 어떻게 배치되는지를 그리는 도면이요. 법은 그냥 포장지예요. 진짜 구조를 감추기 위한."

교수님은 한참 동안 찻잔을 들여다보셨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분도 알고 계셨으니까.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다른 길을 걷겠습니다."

아버지는 서재에서 위스키를 드시며 고개만 끄덕이셨다. 실망하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상하고 계신 듯했다.

"최서진."

"예, 아버지."

"구조를 읽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길이다."

그날 밤 나는 사법고시 교재들을 정리했다. 마지막 노트의 첫 페이지에는 대학 입학 첫날 적어둔 문장이 있었다.

"정의는 존재한다."

나는 그 종이를 구기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접어서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보관하듯이. 그리고 다시는 그 서랍을 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이후 나는 흐름에서 벗어났다. 대신 구조 안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것이 더 안전했으니까.

List :  최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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