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can only be understood backwards; but it must be lived forwards.”
- Søren Kierkegaard
나는 베를린에서 살았다. 정확히는 베를린 미테 지구의 작은 아파트에서 24년간 살았고, 그곳을 떠날 때까지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다. 24년이나 한 곳에서 살았는데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1973년의 오메가를 산 것은 베를린을 떠나기 일주일 전이었다. 프리드리히슈트라세의 골동품 상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시계였는데, 하루에 정확히 30초씩 늦었다. 상점 주인은 수리를 권했지만 나는 그대로 샀다. 완벽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 완벽한 것들은 언제나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겨울은 길었다. 눈이 2월까지 내렸고, 나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헬스장에 갔다. 헬스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인사만 나눴다. 독일어로 "Guten Morgen"이라고 말하면 그들도 똑같이 대답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싱크탱크에서 일한 지 8개월째였다. 나는 위기 시나리오 분석을 담당했다. 정형화되지 않은 상황들,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을 다루는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일에 재능이 있었다. 아마도 내 자신이 예측 불가능한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인지 독일인인지 확실하지 않은,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존재.
마르쿠스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42세의 성실한 남자였다. 두 아이의 아버지이고,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는 가끔 가족 사진을 보여주곤 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적당히 미소를 지었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나에게는 여전히 추상적이었다.
문제는 3월 첫째 주에 시작되었다.
데이터 검토 중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르쿠스가 제출한 보고서의 수치가 원본과 달랐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패턴이 있었다. 모든 변경사항이 프로젝트 성공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조작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실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관찰해보니 의도적이었다. 마르쿠스는 자료를 조작하고 있었다.
그 주 목요일 오후, 마르쿠스가 전화를 받는 것을 들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독일어로 말했다.
"네, 알겠어요... 다음 주 화요일에...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랑해요."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는 모른 척했다.
금요일에 그가 조퇴하는 것을 봤다. 평소와 달리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 그는 눈이 빨갛게 부어서 출근했다.
"아내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어요."
점심시간에 그가 말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순간 나는 왜 그가 자료를 조작했는지 이해했다. 프로젝트가 성공해야 계약이 연장된다. 계약이 연장되어야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된다. 아내의 치료비, 아이들의 양육비. 나는 그 사실을 알고도 4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신고해야 했다. 조직의 규칙대로라면 그래야 했다. 하지만 뭔가 다른 것이 나를 막았다. 감정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모호하고, 동정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무언가.
네 번째 날 밤, 나는 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결정을 내렸다.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적어도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는.
하지만 다섯 번째 날 아침, 모든 것이 무너졌다.
완전히 다른 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마르쿠스의 조작과는 무관한 일이었지만, 내부 보안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마르쿠스의 조작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조사관이 물었다. 50대의 여자였는데,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판단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마르쿠스는 즉시 해고되었다. 나는 경고 처분을 받았지만 계속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동료들의 시선이 달라졌고, 무엇보다 내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날 밤 나는 크로이츠베르크의 타투샵에 갔다. 평생 타투를 해볼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런 충동이 일었다.
타투이스트는 젊은 여자였다. 검은 머리에 팔에 복잡한 무늬의 타투를 한 사람이었다.
"뭘 새기고 싶어요?"
"'Fühlen ist ein Fehler'요."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감정은 실수다?"
"네."
"어디에 할까요?"
나는 셔츠를 벗고 왼쪽 쇄골을 가리켰다. 매일 거울을 볼 때마다 확인할 수 있는 곳. 잊지 않을 수 있는 곳.
"확실해요? 쇄골은 아픈 부위거든요."
"괜찮습니다."
바늘이 피부를 파고드는 동안 나는 마르쿠스를 생각했다. 그의 빨간 눈, 떨리는 손, 가족 사진. 그리고 내가 내린 결정을. 감정이 논리를 앞질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타투가 끝났을 때 나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무언가 결정적인 선을 그은 것 같았다.
다음 주에 나는 사표를 냈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상사에게 말했을 때 그는 놀라지 않았다. 아마 예상했을 것이다.
"좋은 기회가 있어서?"
"아버지가 소개해준 곳이 있습니다."
델타인베스트. 이상한 이름의 회사였다. 벤처캐피털이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설명을 들어보니 단순한 투자회사는 아닌 것 같았다.
베를린을 떠나는 날, 나는 1973년 오메가를 차고 공항에 갔다. 시계는 여전히 하루에 30초씩 늦었다. 수리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대로 두었다. 완벽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마중을 나왔다. 26년 만에 보는 한국이었다.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언어도, 냄새도, 사람들의 표정도.
"한국어 많이 잊었겠네."
아버지가 말했다.
"조금."
나는 독일어 억양이 섞인 한국어로 대답했다.
델타인베스트의 사무실은 강남에 있었다. 현대적인 건물이었고, 로비에는 추상화가 걸려있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가 찾던 곳을 찾은 것 같은 느낌. 나는 그곳에서 전략실을 맡게 되었다. 팀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했다.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하게, 통제 가능하게 만들었다. 감정이 개입할 여지를 최소화했다.
가끔 새벽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나는 옥상에 올라갔다.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베를린을 생각했다. 마르쿠스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내는 나아졌을까.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하지 않았다. 쇄골의 타투를 만지며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Fühlen ist ein Fehler." 감정은 실수다.